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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ith book 로마서 이야기(김동호)


김동호목사님이 쓰신 책 로마서를 읽으며 감명깊고 밑줄친 내용들을 정리해보았다.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존재가치"(20page)

사람들은 소유가치가 높아지면 잘 사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소유가치가 아니라 존재가치가 높아야 잘 사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건, 안 믿건 소유가치는 높아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를 안 믿고서 존재가치가 높아질 수는 없습니다. 예수 안 믿고 부자가 될 수는 있지만, 예수 안 믿고 잘 살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존재 가치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보여지면 믿겠다"(37page)

"하나님을 보여 달라. 그러면 믿겠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 속은 답답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단 말입니까? 게다가 이것은 논리적으로도 문제가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진리에 이르는 길이 '이해'인 줄 압니다. '이해'를 통해서 '믿음'에 이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롬 1:17)라고 말합니다. 이해를 통해서 믿음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 이해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편적인 원리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산다"(41page)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오직'이란 표현을 참 좋아합니다. '오직'이라고 하면 그것 하나에만 신경 쓰면 됩니다. 얼마나 편한지 모릅니다. 의인은 이것으로 살고 저것으로도 산다고 했으면 이것도 신경 쓰고 저것도 신경 써야 했을 것입니다.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반드시'죽을 것이라는 단정적인 표현으로, 고민의 여지를 주지 않습니다. '죽을까 하노라'는 사탄의 생각입니다.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것은 '오직 믿음', '정녕 죽으리라'와 같이 단정적이며 확신에 차 있습니다. 그것을 붙들어야 합니다. 성경은 "믿으면 좋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믿어야만 살아. 사람은 믿음으로만 살아"라고 말합니다.


"왜 목사만 설교합니까?(78page)

어떤 분이 제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만인을 제사장으로 부르셨는데, 하나님 앞에서는 차별이 없어야 하는데 왜 목사만 설교하고 목회합니까?" 제가 그 분에게 이렇게 답했습니다. "왜 의사만 수술합니까? 저도 한번 환자의 배 가르고 수술해보고 싶습니다." 모든 일에는 전문성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구별이 필요한 것입니다.

의사만 수술해야 하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전문성에 있습니다. 설교하고 목회하는 일 역시 전문성에 관련된 것이므로 목사에게 일임된것입니다. 목사만 주의 종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좋아하는 목사님 따라 교회갈꺼야"(83page)

제가 시무했던 높은뜻숭의교회에서 몇 년 전 중대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7년 정도를 사역하면서 꽤 큰 교회로 성장했을 때였는데, 교회를 넷으로 나누기로 한 것입니다. 목사님 네 분을 세워 각 교회를 맡도록 하고, 저는 1년 동안 한 달에 한 번씩 각 교회를 돌면서 설교하기로 했습니다. 그러자 일부 교인들 사이에서 이런 말이 나왔습니다. "난 교회 안 정할 거야. 목사님이 설교하시는 교회에 가서 예배드릴 거야." 제 기분이 어땟을까요? 솔직히 저도 사람인지라 저 따라 가서 예배드린다는데, 기분 좋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제 설교가 좋다면 생각도 저와 같아야지요. 설교는 좋아하면서 왜 생각은 다릅니까? 저는 저를 따라다니며 예배드리는 분들에게 이런 보증서를 써드릴 수 있습니다. '절대 천당은 못 간다.' 하나님이 '너는 김동호 따라다닌 사람이지 나 따라다닌 사람은 아니지 않느냐?' 라고 하실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이말이 그들에게는 큰 충격이었던 것 같습니다. 좋아해서 따르는 목사에게 천당 못간다는 말까지 들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맞는 말 아닙니까? 누구 목사 설교 들었다고 찬당 가는 것 아닙니다. 어느 교회 다녔다고 찬당 가는 것 아닙니다. 교회 장로 됐다고, 권사 됐다고, 집사 됐다고 천당이 보장된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이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롬2:28)라는 말씀에 걸리는 것들입니다.


"사탄교의 제1교리"(98page)

사탄을 숭배하는 사탄교의 제1교리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네 삶의 주인은 너 자신이다." 하와에게 선악과를 따먹으라고 할 때 "네가 하나님이야"라고 했던 사탄은 지금도 "네 삶의 주인은 너 자신이다"라고 꼬드기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얼마나 매력적인 사상입니까? "운명아 비켜라. 내가 간다! 내 삶의 주인은 나야!" 특히 젊은이들은 껌뻑 넘어갈 만한 매력적인 사상입니다.

자기를 신뢰하고 자신을 삶의 주인으로 삼으면 왜 망합니까?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어도 안 망하고 잘 살려면 내가 유능해야 합니다. 내가 전지전능하다면 내 인생의 주인어어도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능합니다.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라 한 치 앞도 못 보는 존재입니다. 그러니 자기를 신뢰하면 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이너스에 부어주시는 은혜"(102page)

초등학교에서 배우는 수학 공식 중에 '마이너스(-) 곱하기 마이너스(-)는 플러스(+)', '마이너스(-) 곱하기 플러스(+)는 마이너스(-)' 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그러니까 마이너스적인 존재입니다. 이것은 누구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세리도 마이너스, 바리새인도 마이너스, 창녀도 마이너스, 우리도 마이너스입니다.

그런데 자기 인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달라집니다. "나는 마이너스다"라고 인식하면 플러스적인 요인이 나옵니다. 그런데 '나는 플러스야.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않아. 나는 기도하고 금식하고 십일조도 내'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을 플러스로 인식하면 마이너스의 결과가 나오는 것입니다. 


"죄는 관계를 끊는다"(153page)

창세가 2:16,17절에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처음 하신 말씀이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나라.

하나님은 사데교회를 향해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계 3:1)라고 책망하십니다. 모양은 살아 있으나 실상은 죽은 것입니다. 그러면 '실상 죽음'이란 어떤 상태일까요?

첫째는 하나님과의 단절입니다.

둘째는 사람과의 관계가 단절됩니다.


"상처를 째기만 하는 것은 치료가 아니라 폭력이다"(167page)

우리에게 다른 사람의 상처를 알게 되었을 때 이리저리 소문내어 그 사람을 벌거벗게 만들고자 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제가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인간관계훈련을 받을 때, 이런 훈련을 했습니다. 한 사람을 도마 위에 올려놓는 것입니다. 그러고는 한 시간 동안 평소에는 체면 때문에 말하지 못했던 그 사람의 약점과 허물에 대해 다 이야기해줍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완전히 벌거벗겨진 것처럼 부끄러워하며 얼굴이 새빨개집니다. 그러나 그 시간을 통해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객관적으로 알게 되고 배우게 됩니다.

한번은 한 친구가 도마에 올라섰는데, 그때 정말 호되게 당했습니다. 우리는 '다 너를 위해 이야기해주는 거야'라고 하면서도 은근히 즐기며 그 친구의 약점과 허물을 거침없이 쏟아냈습니다. 그 친구는 어쩔줄 몰라 얼굴이 벌게져 있었습니다. 그 훈련을 인도하시던 분은 심리학과 상담학을 전공하신 연세 지긋한 할아버지 목사님이었는데, 그 분은 과정이 진행되는 내내 아무 말씀 안 하시고 그저 묵묵히 듣기만 하셨습니다. 그날도 묵묵히 듣기만 하셨습니다.

그날의 과정을 마무리하고 돌아가려는데, 그때까지 아무 말 없이 듣기만 하시던 목사님이 그 친구에게 다가가시더니 말없이 꽉 껴안아주셨습니다. 얼굴이 벌게져 있던 그 친구는 목사님 품에 안겨 엉엉 울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때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쥐구멍이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친구의 허물을 덮어주고 싸맬 줄 아는 아량이 제게는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나는 할 말은 해야 해!"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이런 사람들을 좋아합니다. 저희 아버지도 그랬습니다. 교회에도 이런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런데 제 경험을 돌아볼 때 그들이 하는 말은 별로 도움이 안 되었습니다. 그들은 바른 말을 합니다. 옳은 말을 합니다. 곪은 상처를 쨉니다. 그러나 그들은 상처를 째고 나서 내버려둡니다.

의사들이 종양이나 고름 때문에 상처를 쨀 째 어떻게 합니까? 그냥 내버려둡니까? 아닙니다. 째고 고름을 짜냈으면 꿰매고 약을 발라줍니다. 이후에도 그 상처가 아물 때까지 치료를 계속합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 다 하는 칼잡이들이 종종 일만 저지르는 것을 봅니다. 그들은 상처를 쨉니다. 그런데 싸맬 줄을 모릅니다. 싸매지 않으면 상처는 점점 더 벌어지게 됩니다. 상태가 더 심각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 (182page)

우리는 '나를 위해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에는 욕심을 부리면서도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는 매우 인색합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바뀌어서 "이 정도만 먹고 입으면 돼, 다니는 데 불편 없으면 돼" 하고 우리를 위해서는 절제하고 절약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 써야 합니다.


"하나님이 돌아가셨어요"(196page)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하다가 재판을 앞두고 두려워 떨 때 그의 부인이 상복을 입고 촛불을 켰다고 합니다. 그래서 루터가 "누가 죽었소?"라고 묻자 부인은 "하나님이 돌아가셨어요"라고 말했습니다. 루터는 화를 벌컥 냈습니다. "하나님이 돌아가셨다니! 이런 망발이 어디있소?" 그러자 부인은 "두려워 떠는 당신 모습을 보니 하나님이 돌아가신 것이 틀림없어요"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아내의 그 말을 듣고 루터는 마음을 믿음으로 새롭게 하고 재판을 받으러 갔습니다. 그때 작사한 찬송시가 이것입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바로 이것이 믿음입니다.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라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222page)

복음을 전해서 한 사람의 생명이 주께로 돌아오는 이런 일은 우리가 제1의 소원으로 삼을 만한 것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십자가에 걸어도 좋을 만한 일은 복음 전하는 일입니다. 많은 사람을 주께로 돌아오게 하는 일입니다. 구원 얻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우리 모두가 목사가 되어야 할까요? 지금까지 잘하고 있던 일들을 팽개치고 다들 신학교 가서 목사가 되겠다고 나선다면 아마 하나님이 펄쩍펄쩍 뛰실 것입니다.

보통 목회자를 '성직자'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실상은 모든 직업이 다 '성직'입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벧전 2:9). 여기서 '왕 같은 제사장'이 성직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장사하는 사람이나 연극하는 사람이나 또 목회하는 사람이나 그것을 다 하나님의 일로 받아들이면 모두 성직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외국어대학교 교수님들과 함께 오랫동안 성경공부를 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한 교수님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그 분이 학교 게시판에 "나는 예수 믿는 교수입니다. 나와 성경공부를 할 사람은 내 연구실로 오십시오"라고 올렸다고 합니다. 그러자 30명이 넘는 학생들이 왔는데, 중요한 것은 그중 9명이 지금까지 한 번도 교회에 다닌 적이 없는 학생이라는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누가 복음을 전하는데 더 유리한 직업을 가지고 있습니까? 교수닙입니다. 그러니 목회자만 왕 같은 제사장, 주의 종, 성직자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으면 복음이 너무 제한됩니다. 모든 직업이 성직이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경제학이나 경영학 교수님이 수업 시간에 성경을 가르쳐야 할까요? 그러면 안 되지요. 경영학 교수는 경영학을 잘 가르쳐야 합니다. 다만 그 바탕에 기독교적인 신앙이 있어야 하겠지요. 또한 삶의 모범을 보임으로써 학생들에게 도전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잘 이루어나가면 복음을 전하는 데 목사보다 얼마나 더 유리하겠습니까!


"차차 신앙에 머물 것인가?"(260page)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한의사이신 한 장로님이 친구에게 전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늘 "차차 믿지 뭐"하면서 미루기만 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그 차차 할아버지가 다리를 삐어서 퉁퉁 부은 다리로 침을 맞으러 그 장로님에게 왔습니다. 그때 그 장로님이 이렇게 말했답니다. "차차 놔 줄게. 차차."

우리 신앙도 대개 '차차 신앙'입니다. 조금 더 있다가, 조금 더 놀다가 하겠다고 합니다. 어리석은 것입니다. 지금은 자다가 깰 때입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가 다 되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신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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