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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초 ‘베이비 박스’ 만든 이종락 목사

ThanksAlways 2012. 1. 9. 19:20


국내 최초 ‘베이비 
박스’ 만든 이종락 목사 

ㆍ부모도 버린 아이들, 그 생명을 지키다


2009년, 국내 최초로 '베이비 박스'가 설치됐다. 지금까지 29명의 아이가 베이비 박스에 놓였다. 장애아 생명 살리기 운동에 앞장서며 버려진 아이들의 부모 되기를 자청하는 이종락 목사를 만났다.

2011년 2월 16일 새벽 1시 50분 경.


베이비 박스에 벨이 울렸다. 남자아이가 파란색 아이 이불에 싸여 놓여 있었는데, 부모가 안심이 되지 않는지 자꾸만 베이비 박스의 문을 열어 아이를 토닥거리는 것 같아 안에서 금방 문을 열지 못하고 한참을 기다려주었다. 가방에는 내의와 분유통, 가제 손수건이 들어 있었다. 이름을 요셉이라고 지어주었다.





태어난 지 26일 만에 베이비 박스를 통해 들어온 남자아이에 대해 이종락(58) 목사가 '베이비 박스 기록일지'에 쓴 기록이다. 이 목사는 베이비 박스를 설치한 지난 2009년 12월 이후 베이비 박스에 아이가 들어왔다는 신호인 벨소리가 울릴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길거리에 버려져 죽어가는 어린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베이비 박스지만 부모의 사랑 안에 살 수 없는 아이가 또 한 명 늘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먹먹해지기 때문이다.

아픈 아이 낳고, 아픈 아이를 거두다


서울에 첫눈이 흩날리던 12월 초. 난곡동의 유난히 가파른 비탈길 위에 자리한 '주사랑 공동체의 집(이하 공동체)'을 찾았다. 얼핏 보기에는 평범해 보이는 일반 주택. 초인종을 누르기 전에 베이비 박스의 위치부터 확인했다. 듣던 대로 공동체의 담벼락에 뚫린 구멍 안에 아이를 넣을 수 있는 작은 상자가 자리 잡고 있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낡은 유모차 몇 대가 가지런히 기대어 서 있고, 커다란 기저귀 박스가 높다랗게 쌓여 있었다. 신발장에 가득 찬 작은 신발들과 옹기종기 빨래건조대에 걸린 수십 벌의 옷가지가 공동체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의 수를 가늠케 했다.

이종락 목사는 때마침 은만씨(25)에게 점심을 먹이고 있었다. 은만씨의 식사는 멀건 미음과 보리차가 전부. 주사기로 음식물을 입 안에 넣어주면 가쁜 숨을 내쉬며 힘들게 삼킨다.

"가끔 아이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볼 때가 있어요. 그럴 때마다 '아, 저것이 죽음의 눈빛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죠. 아픈 아이들을 생각하면 우리는 불평, 불만할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에요. 사지 멀쩡하고 건강하잖아요. 우리가 아무리 힘들어도 이 아이들만큼은 아닐 테니까. 이런 아이들의 고통이야말로 표현할 수가 없는 거잖아요."

은만씨는 24년 전 이종락 목사의 둘째 아이로 태어났다. 얼굴 장애로 인한 감염으로 뇌세포가 손상돼 전신이 마비됐다. 태어날 때부터 골반 뼈가 부러져 있던 터라 두 다리가 양쪽으로 일(一)자 형태로 놓여 있다. 은만씨는 태어나서 한 번도 두 다리를 모아본 적이 없다고 했다. 스스로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지만 싫다든지, 좋다든지 하는 감정은 표현할 수 있다는 게 이종락 목사의 이야기다. 빨갛게 충혈된 은만씨의 눈을 바라보니, 마치 '반갑다'는 말을 하고 싶은 듯 보였다.

"은만이가 처음 태어났을 때 의사는 포기하라고 했어요. '이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하나' 막막했지만 '나에게 온 생명이다'라는 생각을 하니까 어떻게든 살려야겠더라고요. 14년간을 거의 병원에서 살다시피 했죠. 그때 상희(16)의 할머니를 만나게 됐어요."





12010년 3월부터 최근 2011년 11월 8일까지 베이비 박스를 통해 들어온 스물아홉 명에 대한 관찰 내용이 적힌 '베이비 박스 기록일지'. 그 당시 상황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그때 찍은 사진과 발도장도 있다.2'베이비 박스' 옆에는 '이곳은 아기를 보호하고 생활하며 생명을 살리는 생활 공동체입니다. 불가피하게 아이를 돌보지 못하거나 키우지 못할 처지에 있는 미혼모 아기와 장애로 태어난 아기를 유기하거나 버리지 말고 여기에 넣어주세요'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3대식구가 함께 지내다 보니 설거지, 청소, 빨래 등 할 일이 많다. 빨래만 해도 13kg 세탁기를 하루 네 번이나 돌려야 한다.


1999년. 당시 세 살이었던 상희는 서울대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고 있었다. 그때까지 장애가 없던 상희는 재래식 화장실에 빠지는 사고를 당했다. 노폐물을 많이 삼켜 병원 치료를 받았는데 당시 의료진이 목 안에 찬 노폐물을 제때 빼주지 않아 질식하는 바람에 뇌에 손상을 입었다. 상희의 어머니는 정신지체로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웠고, 아버지는 가출 후 행방불명된 상태라 할머니 혼자 아이를 돌봐야 하는 상황이었다. 병원에서 은만씨를 돌보며 환자와 보호자에게 전도를 하던 이 목사를 며칠 동안 관찰하던 상희 할머니는 이종락 목사에게 "당신이 상희를 돌봐주면 예수를 믿겠다"라며 간곡히 부탁했다.

"은만이를 돌보는 것만으로도 무척이나 벅찬 상황이었죠. 그런데 예수님을 믿겠다는 말에 '네, 알겠습니다'라는 말이 불쑥 튀어나오더라고요. 아내에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덜컥 허락을 해버린 거죠. 그리고 상희가 저희 집에 온 지 몇 달 뒤 할머니가 돌아가셨어요."

처음 이 목사의 집에 들어온 상희의 상태는 은만씨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규칙적으로 기도를 통해 노폐물을 빼줘야 했던 상희는 앉을 수도, 말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은만씨는 바로 옆 침대에 누워 있는데, 상희는 보이지 않아 조심스럽게 지금 어디있느냐고 물었다.

"학교에 갔죠."
이 목사는 기적이라고 했다. 은만씨를 돌보며 그동안 어깨 너머로 배운 물리치료를 상희에게 꾸준히 해주었고, 병원에도 열심히 다니게 했다. 그랬더니 이제는 혼자 앉아 밥도 먹고 대화를 나눌 수도 있으며 특수학교에도 다닐 정도로 상태가 좋아졌다.

그 뒤 많은 아이들이 이 목사의 품 안에 안겼다. 다운증후군으로 980g의 작은 몸으로 태어나자마자 산부인과에 버려진 주은(9)이와 손가락과 발가락이 모두 붙은 채 공동체 대문 앞에서 발견된 루리(10)도 만났다. 상희가 들어오던 해인 1999년 가정 교회로 시작된 공동체의 규모는 점차 커졌다. 이따금 공동체의 대문 앞이나 주차장에 아이를 버려두고 가는 부모들도 있었고 알음알음으로 "아이를 맡아달라"며 사람들이 찾아왔다. 이종락 목사는 은만씨와 주은이, 믿음이, 상희와 같이 대부분 장애를 가진 아이들, 열네 명을 거뒀다.

버리는 아이, 이곳에 넣어주세요

"2008년 공동체 주차장에 버려진 온유(4)를 만났어요. 부모가 아이를 놓고 간 지 20분이 지나 전화를 했더라고요. 5월이었지만 새벽에는 날씨가 제법 찼죠. 유난히 추었던 그날 새벽 세 시, 작은 굴비상자 안에 온유가 들어 있었어요. 얇은 배냇저고리를 입고 겉옷도 걸치지 않은 아이가 여름 이불에 싸여 있었죠. 피부가 퍼렇게 될 정도로 추위에 떨고 있었어요."

때마침 배고픈 길고양이가 길게 울며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는 것이 눈에 띄었다. 인적도 끊긴 시간, 조금만 늦게 아이를 발견했더라면 어떻게 됐을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는 이 목사. 그 후로 길거리에 유기돼 얼어 죽은 영아의 사체가 발견됐다는 뉴스를 접할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고 한다.

"1년에 전국에서 버려지는 아이만 1만 명이 넘고 그중에 길거리에 유기되는 아이들이 100명이나 되죠. 통계가 그렇다는 거지, 실제로는 더 많을 거예요. 아이들이 쓰레기장이나 화장실에 버려져 죽어가는 것을 보다 못해 '베이비 박스'를 생각하게 됐어요."

부모의 사정으로 인해 아이가 버려지더라도 그 아이의 생명만큼은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름이면 세균 감염 등을 예방하고, 겨울이면 추위를 피할 수 있는 마땅한 방법을 고안해내야 했다. 당시 체코의 한 시설에 베이비 박스가 설치됐다는 소식을 접하고 무릎을 탁 쳤다. 이 목사는 비슷한 장치를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을 했지만 알맞은 제품을 구할 수 없어 자체적으로 제작했다. 그렇게 2009년 12월에 가로 70cm, 세로 40cm, 높이 55cm의 작은 상자를 공동체의 담벼락에 설치하면서 국내에서 최초로 베이비 박스가 탄생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때부터 복잡하게 얽히기 시작했다. 일부 시민 단체들이 "영유아 유기를 조장한다"며 공동체를 비난하며 보건복지부에 철거를 요청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 목사는 뜻을 굽힐 수가 없었다. 그 순간에도 어딘가의 차디찬 길바닥에서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설치해놓고도 설마 했어요. 더럽고 추운 땅바닥에 버리느니 조금은 더 아늑하고 안전한 곳에 놓으라는 의미였지만 막상 베이비 박스 안에 처음 아이가 들어왔을 때 정말이지 기가 막혔죠. 베이비 박스를 구경한다고 사람들이 자꾸 열어보는 통에 벨이 자주 울렸어요. 2010년 3월 대낮에 또 벨이 울리기에 누군가 호기심에 열어본 거겠지 했지만 혹시나 해서 나가보니 아주 건강한 사내아이가 놓여 있더라고요."

아이의 이름을 모세로 지었다. 모세는 잠시 공동체에서 생활하다가 다른 목사 부부에게 입양됐다. 그 후로 모세를 포함해 지금까지 총 스물아홉 명의 아이가 베이비 박스를 통해 들어왔다. 그중에는 며칠 만에 부모가 아이를 다시 찾으러 온 경우도 있었다.





1은총이는 장애가 없는 아이다. 미혼모인 엄마에게서 버려졌다. 눈만 찡긋해도 까르르 넘어가는 웃음소리가 참 예쁘다.22008년 공동체 주차장에서 발견된 온유는 혼자서도 잘 노는 기특한 아이다. 네 살이 다 되도록 걸음마를 못 떼 이 목사 부부의 애를 많이 태웠다.3새벽이는 감기 한 번을 쉽게 지나가는 법이 없다. 다운증후군에다 선천성 심장질환인 대동맥 판막협착증까지 있어 감기에 걸리면 호흡곤란 증세를 겪곤 한다. 지난 11월 감기를 호되게 앓았다는 새벽이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아이가 들어온 지 일주일쯤 지났을까, 아버지란 사람이 아이를 찾으러 왔더라고요. 일은 해야 하는데,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없었던 모양이에요. 어디다 아이를 맡길 형편도 되지 않아서 전남 여수에서 이곳 공동체까지 먼 길을 달려 아이를 놓고 간 거죠. 그 길을 다시 돌아가면서 아이 생각이 떠나질 않았대요. 그래서 어떻게든 아이를 키워보겠다며 데려갔죠. 그렇게 여섯 명의 아이가 다시 부모의 품으로 돌아갔어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심각한 장애를 가진 아이를 보살피고, 밤새 보채고 칭얼거리는 아이들을 달래는 것이 힘들기 때문은 아니었다. 이종락 목사를 힘들게 하는 것은 베이비 박스를 곱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지난해 4월에 구청에서 직원들이 우르르 몰려왔어요. 비인가 시설이기 때문에 저와 함께 동거하는 아이들이 너무 많은 것이 문제라고 했죠. 베이비 박스를 철거해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고요. 힘없는 저로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어요. 아이가 들어오면 구청에 신고를 해야 했고, 그러면 구청 직원들이 나와 아이들을 데려갔어요. 그 후로는 공동체에 들어온 아이들에게 이름도 지어주지 못하고 그대로 보내야만 했죠."

그동안 공동체에서 생활하던 스물세 명의 아이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위탁업체로, 지역 센터로, 다른 교회로 옮겨간 아이들 중에는 아프다는 이유로 공동체를 오가며 생활하는 아이들이 더 많다. 이종락 목사는 그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입양 절차를 밟고 있다고 했다. 이미 여섯 명의 아이를 자신의 양자로 입적시킨 이 목사는 최근 세 아이의 입양 판결을 더 받아냈다. 모든 아이들을 자식으로 받아들이고 싶지만 몇몇 아이들은 서류상 부모가 있어서, 또 몇몇 아이들은 법원의 판결이 나지 않아서 그조차도 쉽지가 않다.

장애아 생명 지키기 운동

인터뷰가 있던 날은 기리(2)가 병원에 가는 날이었다. 기리는 청각장애, 시각장애, 안면기형, 심장 이상 등의 복합 장애를 가진 아이다. 여러 차례 수술을 받았지만 아직도 더 많은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기리가 예쁘게 옷을 차려입자 이 목사의 마음이 급해졌다. 이 목사가 인터뷰를 마치고 거실로 들어서자 빈 상자 하나를 가지고 신나게 놀고 있던 은총(1)이와 새벽(2)이, 가을(2)이가 기고 굴러서 이 목사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지금 병원에 가야 하는데…. 여하간 베이비 박스는 못 없앱니다. 여기는 생활 공동체라 허가받을 필요도 없는 곳이에요. 여러 변호사들께 상담을 받아봤지만 베이비 박스가 불법인 것도 아니더라고요. 만약 베이비 박스를 없앤다고 칩시다. 그렇다면 다른 대책이라도 있는 겁니까?"

이날 새벽 한 시까지 잠을 안 자고 보챘다는 은총이를 안고 있던 이종락 목사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단호했다. 유난히 하얀 피부에 귀여운 눈웃음을 짓는 은총이를 곧 떠나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입양 절차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한 모양이었다.

어디선가 주은이가 통통거리며 뛰어오더니 아빠를 향해 살인 미소를 날렸다. 안경을 낀 주은이는 얼핏 보면 보통 아이와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병원에서조차 치료를 포기했던 그 주은이가 맞는지 믿기지가 않을 정도였다. 공동체에 들어왔을 당시 맥박도 없고, 체온도 없어 전기장판으로 둘둘 말아 가슴에 품어야 했던 그 작은 아이가 지금은 초등학교 1학년이 됐다. 태권도를 곧잘 한다는 주은이는 보기에도 활기가 넘쳐 보였다.

"주은이는 아무런 생명 보조 장치 없이 산부인과에서 일주일 넘게 살아 있었던 아이예요. 심장에 구멍이 두 개나 뚫려 있는 980g의 작은 체구로 거의 숨도 쉬지 못하며 생명을 지켜왔던 거죠. 그렇게 꺼져가던 생명도 잘 보살펴주면 주은이처럼 똑똑한 다운증후군 아이가 될 수 있어요. 자기 앞가림은 다 하거든요. 좌ㆍ우뇌의 연결 부분이 없고 성별이 분명치 않았던 믿음이도, 손가락과 발가락이 붙어 있던 루리도 여러 차례 수술을 받아야 했지만 지금은 씩씩하게 뛰어다니는 사내아이가 됐어요. 장애아라도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어요. 베이비 박스는 이 아이들의 생명을 지키는 곳이에요. 제가 어떻게 포기할 수 있겠어요."

진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기리와 이 목사가 급하게 병원으로 떠났다. 사람이 들고 나는 데 익숙해진 모양인지, 남아 있는 아이들은 여전히 신나게 잘 놀고 있었다. 은총이에게 빈 상자를 몇 번 굴려주니, 뭐가 그리 우스운지 깔깔거리며 천사의 웃음을 보여주었다. 두 명의 아이들이 잠을 자고 있고, 서너 명의 아이들이 오가며 놀고 있는 거실은 많은 아이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고요했다.

"큰 애들이 다 학교에 가서 조용해요. 특수학교에 다니는 초등학생 네 명, 고등학생 한 명, 중학생 한 명이 돌아오면 시끌벅적하죠."

이종락 목사 부부와 공동체에서 함께 생활하며 아이들을 돌보고 있는 전영란 전도사는 학교에서 돌아올 아이들 맞을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전 전도사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제 곧 공동체를 떠나야 한다는 은총이의 손을 살며시 잡아보았다. 여리고 보들보들한 아이의 손을 잡으니, 이 아이가 베이비 박스에 놓인 순간이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아 마음이 뭉클해졌다.

아이들과의 짧은 만남을 뒤로한 채 바쁜 취재 일정에 쫓겨 황급히 공동체의 문을 나서자 첫눈을 가져다줬던 푸근한 바람이 어느새 매섭게 변해 있었다. 옷깃을 여미며 하늘을 올려다보니 골목 어귀에 걸린 작은 팻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베이비 박스 아기 넣는 곳'이란 문구를 보자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누군가는 그 골목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베이비 박스 안에 아이를 넣어두고 수십 번은 돌아봤을 그 골목에 서서, 더 이상 길거리에 버려져 싸늘하게 식어가는 아이가 없기를, 그래서 더 이상 베이비 박스가 필요 없는 세상이 오기를 바라본다. 세상에 소중하지 않은 생명은 하나도 없다는 이종락 목사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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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진혜린(객원기자) ■사진 / 이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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